Page 68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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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돌멩이회”  071








                             이종후:    돌멩이회라는 동인의 타이틀을 보면 어떤 결기가 보입니다. 돌멩이는 단단하고, 어떻게 보면 모나 있죠. 동인의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셨나요?

                             김영중:    예, 돌멩이가 좀 딱딱하죠. 그때는 선후배 관계가 굉장히 엄격했습니다. 그리고 위계가 확실한 선을 긋고 있어서 그런

                                     것들에 대한 반항 의식도 있었죠. 그래서 화실에 모여서 ‘우리 고등학교 미술부끼리 뭉쳐 보자!’라는 반발 의식으로
                                     생겨난 것 같아요. 자연 발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종후:    당시 돌멩이회 보다 조금 먼저 생긴 관점 동인이 있지 않습니까? 관점 동인도 어떻게 보면 당시 제주 미술계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 앞에서 청년작가들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것들에 대한 반발이었을까요?


                             김영중:    하나의 갈망이죠. 그때는 모든 게 제주대학 미술교육과가 중심이었잖아요. 그래서 아카데믹한 그림을 많이
                                     요구했는데 그것에 대해 싫증이 생긴 겁니다. 좀 더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작품 세계를 찾기 위해서 탄생이 된 것
                                     같습니다.

                             이종후:   돌멩이회에서 시상청년작가회로 명칭을 변경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김영중:    돌멩이회가 네 명으로 시작을 했는데 이후 많은 후배들이 동참을 했어요. 후배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고,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시 강부언, 강승희, 홍성석 등 새로운 작가들이 다수 영입이 되어서 좀 더
                                     발전적인 이름을 붙인 게 시상청년작가회입니다.
                                       그래서 1982년 5회 전시는 시상청년작가회로 개최되고, 그때 남양미술회관에서 대대적인 규모로 진행했습니다.
                                     작품들은 대부분 대작이었어요. 오브제를 이용한다든가,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작품 등이 있었는데 그때 제 작품도
                                     회화가 아니었어요. 그냥 오리털 잠바를 벽에 딱 걸어놓고 그 앞에서 직접 해프닝을 벌인 거지요. 나이프로 잠바를
                                     막 찢어요.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선포를 막 끄집어내요. 그런 것들이 바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사장에서 쓰다 버린 베니다 합판을 전시장에 갖다 놓고 트럭을
                                     묶는 로프 그런 것들로 무의식적으로 막 감아내는 작업들도 있었어요.
                                       김성찬 작가의 경우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했는데 양철 판에 녹슬고 흘러내린 것들을 아주 세밀하게 그린 작품을
                                     3점 정도 전시했어요. 그리고 김평식 작가는 200호 정도의 큰 캔버스에 둥근 철을 하모니처럼 구성한 작품을 전시
                                     했고요. 강승희, 홍성석 작가 등은 사회 고발성이 담긴 휴먼 이미지 작업을 많이 했었지요. 여러가지 방법적인 모색을
                                     통해서 전시장이 확 달라졌어요. 제주 미술이 확 달라진 거예요.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제일
                                     화려한 전성기였고, 제주에서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주대학교 교수였던 서양화가 강길원 교수가 오셔서 ‘시상청년작가회의 작품들이 아주 좋다.’며 칭찬을 많이
                                     하고 간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이종후:   돌멩이회에서 시상청년작가회로 명칭을 바꾸고 개최된 첫 전시회였던 것이죠? 그 이후로도 해마다 전시를 했습니까?

                             김영중:    네 그렇죠. 매 해! 빠지지 않고 전시를 했죠. 그리고 시상청년작가회 활동을 하면서 관점 동인에도 가입을 하는
                                     회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강승희, 김성찬, 홍성석 작가 등 몇몇 작가들이 관점에 들어가서 자기 역량을 발휘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그 후에도 꾸준히 모여서 전시를 계속 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오랫동안 하고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 관계, 그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선배의 엄격함이 있었는데, 시상청년작가들은 그런 게 없었습니다. 서로 보듬어 주고 작품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런저런 전시가 끝나면 주로 탑동에 갔습니다. 허름한 고갈비 막걸리 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가면
                                     꼭 작가 몇 명이 있었어요.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이승현, 현익찬 작가 그리고 누구 작가도 있어서 밤새 한잔하면서
                                     현대미술을 논하고 발전 방향도 제시하면서 관계가 원만하게 잘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우리 시상작가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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