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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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돌멩이회”  075






                             이종후:    시상작가회 대표로 활동하실 때 새로운 시도를 했거나,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양경식:    우선 제가 대표로 활동할 때, 시상청년작가회에서 시상작가회로 개칭이 되었습니다. 2001년도예요. 2000년대에는
                                     시상청년작가회가 20년 차를 넘어버린 시기고, 회원 구성도 대부분 40대 중후반에서 50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술 창작에 나이 구분은 진부하고 무의미한 부분입니다만 시상이라는 원래 의미를 살리면서 연륜과 진지함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청년’이라는 단어를 빼는 것에 회원들의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제가 대표를 맡은 6년 동안에는 작업 방향성이나 개념이 바뀌진 않았습니다. 작업의 대부분은 작가 개인의 영역
                                     이지요. 다만 재임 기간 동안 회원들이 생산한 개념을 밖으로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섬이라는 지역적인 여건을 고려했고 타 지역의 현대미술 관련 단체, 작업 성향이 비슷한 단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에 지역별로 존재하는 그룹들을 체크하고 연결 고리들을 동원해서 소개를 받기도
                                     했습니다. 타 지역의 현대미술 그룹들과 협약을 맺고요. 그래서 공동의 주제로 교류 전시를 하게 됩니다. 부산 창작
                                     미술협회와 2001년도에 부산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했었고요. 2002년, 2003년에는 경북 현대미술작가회와 경주
                                     서라벌문화예술회관과 제주문예회관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한 번은 육지에서, 한 번은 제주에서 함께 숙식하고
                                     토론하면서 만들어진 전시입니다. 인천 청년작가협회와 교류 또한 2004년, 2005년도에 제주문예회관과 인천에서
                                     번갈아 진행되었고요.
                                       2000년대 초에는 물류 등의 조달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경북의 경주 지역에서 전시를 할 때 교통 수단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배를 타고 육지로 가고 육지에서 차를 탔는데, 렌트카가 동이 났어요. 한 여름에 차 한 대에
                                     십 여명이 아주 그냥 제주말로 쪽잡하게 붙어 앉아서 이동을 합니다. 지인에게 사정을 말하고 잠시 빌린 어린이집 차량
                                     이었는데, 에어컨 작동이 안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바퀴가 떨어진 거예요.
                                     정비소도 가야하고 약속 시간은 5~6시간씩 지체되고 새벽에 도착을 해서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경험이
                                     있고요.
                                       또 인천 작가들이 제주에 왔을때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가 있었어요. 작품을 위해서 한라산 백록담을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때아닌 한라산 등반을 하게 되었습니다. 20명이 넘는 인원이 줄줄줄 등반을 하는데
                                     퍼포먼스를 해야하는 작가가 꼭 젤리슈즈를 신어야 한다는 거예요. 혹시 아세요? 말랑말랑한 젤리슈즈? 산을
                                     타기 쉽지않은 신발인데 굳이 이걸 신고 가야 된다고 해서 몇 번이나 말렸죠. 몇 번이나 경고를 하고 주의를 줬는데,
                                     정말 고집이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결국 한라산 정상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내려오는데 사단이 난 거에요. 하산 중에
                                     체력이 방전 되어 걷지도 못했어요.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부축하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서 산악구조대에 SOS를
                                     칩니다. 그분은 결국 들것에 누워서 지상을 밟았어요. 후일담이죠.


                             이종후:    시상작가회는 현재도 존속되고 있지만 2000년대만큼 활발한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인 활동의 힘과 장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양경식:    사람을 만나고 전시를 직접 관람해야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소규모의 동인들은 아주
                                     소중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정보를 얻는 것이 너무 빠르죠. 인터넷만 연결되면 온갖 정보가 순식간에
                                     쏟아지고, 공유하고 홍보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동인 활동의 필요성이 낮아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을 공유하는 소규모 동인의 활동은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회합과 토론을 하는
                                     오프라인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판단합니다. 미술을 통해서 시대를 앞서 나가겠다는 개인의 의지는 사회에서 온갖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게 예나 지금의 현실입니다. 개인이 걸어가기 힘든 여정이지만 동일한 지향점으로
                                     결속되어 있는 동인이 있다면 분명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술이라는 항해의 방향성이 되어준다고 생각
                                     합니다. 다만 동인의 지향점이나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친목 모임으로 전락하는 경우에는 활동을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요. 이를 철저하게 경계해야 된다고 봅니다.
                                       1978년 돌멩이회에서 시작해서 현재까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만남과 전시가 있었고 회원들의 들고
                                     남도 있었고, 고난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개개인의 발전을 위한 휴지기에 있습니다. 발전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휴지기를 끝내고 다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것이고 작업을 선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양한 생각과 예리한 개념으로 회원 여러분들을 다시 한 번 뵙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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