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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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2020 제주미술제 ‘동인의 창립과 모색’
이종후: 시상청년작가회 전시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전시가 있으십니까?
김영중: 故 정광철 작가…, 참 안타깝죠.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해서 경기도 수원의 미술교사 발령을 받고 교사로서,
또 작가로서 많은 활동을 합니다. 제가 육지에 있을 때 한번 저를 찾아 와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논하기도 했었는데요,
그 해에 돌아가셔서 20회 시상 청년작가회전은 ‘이 전시회를 故 정광철 회원님께 바칩니다.’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때 시상청년작가회 회원들이 친구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팸플릿에 적어 놨는데 읊어보겠습니다.
“광철, 그렇게 가버린 친구에게로. 시린 바람은 천국에서 흘러온 듯 일렁이는 그들만의 영혼으로 이승을 흔들고
있다. 그런 공간을 타고 자네는 정녕 나와도 숨바꼭질을 해야만 되겠는가. 숨어서, 아주 먼 곳에 숨어서 한가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양거리지 말게. 그래도 자네의 향기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소리마저 들린다네. 자네의 온정,
사랑, 인간미, 예술과 또한 생활의 진솔함.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던 이야기까지 초연하면서도 칼날같은
직시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시각의 향기가 가까운 곳에서 어깨를 두드릴 것 같다네. 물질의 메마름 속에 살다 간
자네의 이승은 한갓 허물과 가식에 지나지 않고 구름과 모래, 산과 물 또한 헛개비일 뿐이네. 인생은 나그네 길,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길. 무엇이 그리 바쁘고 알차게 추구해야 할 일들일까. 모두가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들일 따름이네. 결국 모든 이승의 우리는 자네를 따르게 되리라. 국화꽃잎 흩날리며 함박눈이 구성지던 그 길을
우리 또한 따르리라. 결국엔 자네를 만나게 되리라. 그때 만나세. 1995년 1월 24일 시상청년작가회 일동.”
이렇게 저희들이 추모제를 같이 했습니다.
이종후: 시상청년작가회가 육지 작가들 하고 교류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시상청년작가회가 시상작가회로 명칭이 또
바뀌게 됩니다. 관련한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김영중: 2000년도 25회 전시는 부산의 창작미술협회하고 우리 시상청년작가회의 교류전이 열리게 됩니다. 저도 참가를
했고요. 부산의 창작미술협회는 굉장히 큰 단체입니다. 인원도 40명 정도 되는데, 저희들은 10명 남짓이었죠. 그럼
에도 전혀 위화감 없이 원만하게 교류를 했습니다. 전시했던 작품들은 전부 비구상 작품이었고요. 26회에는
<대상의 무한>(부산문화회관, 2001)이라는 제목으로 또 전시를 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제 청년이 아니다!’,
‘시상작가회로 새롭게 출범 하자.’ 해서 2002년 제주도 문예회관에서 시상작가회전을 하게 됩니다.
그때 양경식 회원이 회장이었어요. 이후 부산, 경북, 인천, 광주, 서울 등 타 지역 작가들도 섭외를 해서 기획 교류전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왕래하면서 시상작가회만의 색깔을 전국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고, 33회에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 초청전>(제주문예회관, 2007)이 개최됩니다. 그동안 시상작가회와 교류했던 전국의 동인 작가들이 총 집결
합니다. 당시 회장이 오승익 작가였는데요. 제주문예회관의 후원을 받아서 화려하게 전시를 했고 큰 이슈가 됐죠.
이종후: 돌멩이회에서 시상청년작가회 그리고 시상작가회로 변화한 것은 내부적으로 발전을 지속해 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변화 발전하며 진행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도 퇴임 후 고향으로
오셨는데 동인 활동에 대해 하고 싶으신 말씀, 개인적인 포부를 말씀해 주세요.
김영중: 예,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올해 동인 활동 42년 차입니다. 시상작가회가 잠시 멈춰서 전시는 쉬고 있지만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기회가 없지만 다시 모일 수 있게 되면,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종후: 제주 미술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 혹은 개인적인 염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