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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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에뜨왈”  097



                               든가 인물이라든가 하는 작품들이었어요.


                        이종후:   네, 당시에 관객들도 많이 왔습니까?


                        김연숙:    주로 가족들이 많았죠. 우리들은 첫 전시이니 아주 뿌듯했죠. 지금도 만나서 창립전 얘기를 할 때에 배꼽 잡고 웃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전시 팸플릿에 무슨 작품을 했는지 내용이 없고 얼굴만 나온 거야, 지금 보면 얼굴만 너무 크게. 그걸 보면서
                               ‘어린 마음에 스스로 해낸 것이 참 뿌듯했구나’ 싶어요. 관객들도 다 지인들이었죠. 가족들 그리고 동기생들이요. 그 당시는
                               고등학교 미술반들이 활성화되었을 시기니까. 고등학교 미술부에서도 오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명확하게
                               기억은 안나요.


                        이종후:    학교 동문 모임으로는 에뜨왈이 처음인 것 같아요. 에뜨왈 이후로 제주여자고등학교의 한우리회,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현 제주중앙고등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오현고등학교 등등 고등학교 미술부 출신 동인들이 생겨 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연숙:    당시에는 고등학교 미술부 활동을 활발하게 했었는데, 졸업 이후에 흩어졌어요. 하지만 에뜨왈이 이렇게 미술 동인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신성미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신성미전’ 개최가 몇 년간 중단되었다가 우리 때에 다시 개최하게 됐었거든요.
                               그래서 전시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레임, 어떤 기대감 그런 추억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들,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창립전의
                               꿈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종후:   학교 미술 교사 중에서 에뜨왈 창립 과정에 영향을 주신 분이 있습니까?

                        김연숙:    저희는 딱 반반이였어요. 3년 기간 동안 1년 반, 1년 반. 두 선생님께 사사를 받았어요.김택화 선생님하고 고영석 선생님의
                               제자죠. 두 분이 상당히 열정적인 분들이여서 그런 열정을 보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지금도 선생님께서는 저희
                               들에게 많은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시고 계시죠.

                        이종후:    단순히 동문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에뜨왈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1994년 쯤에는 <여성의 삶과 현실전>을 비롯해서
                               <여성미술제>까지 개최하면서 자의식의 확장 그리고 사회적 자각과 함께 작품 활동의 범위도 굉장히 넓어졌어요. 당시 변화의
                               동기나 환경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김연숙:    우리가 여고를 졸업했고, 초창기에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같은 게 없었죠.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열악한 환경들이 존재

                               한다는 것을 접하지 못했죠.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여성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에뜨왈에 위기가 왔었어요. 대학생 때에는 모임이 원활했는데, 졸업 이후 작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된 사람도 있고, 각자 흩어지니까 연락하는 것도 힘들어지더라고요. 이렇게 하나 둘 연락이 끊기면서 세 명만 남았을 때가
                               있었어요. 고경희, 홍진숙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이 남아서 고민을 했죠. 해체할 것인지에 대해서… 저는 한 명만 남아서 개인전이
                               되기 전까지는 동인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어요.
                                   그 쯤에 후배들도 합류하게 되었는데, 야무지고 당찬 친구 한 명이 제안을 했던 걸로 기억을 해요. ‘우리가 좀 더 확장성을 갖고
                               사회적인 바람도 일으키는 그런 전시를 합시다!’한 거예요. 모두 동의를 했고, 그 시기에 다들 결혼한 후라 여성의 삶에 대한
                               자각이 싹 틀 때고 해서 <여성의 삶과 현실전>(1994)을 기획하게 됐어요. 제주도에 있는 여성 미술인들이 모였고, 하순애(철학
                               박사) 선생님을 모셔서 페미니즘에 대한 강의를 듣고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이런 과정이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에 전시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에 따라서 책임감도 더 강해지게 되었죠. 이후
                               에뜨왈 회원들만이 아닌 좀 더 다양한 작가들을 만났고,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죠.
                                  <여성의 삶과 현실전> 이후에 <여성이라는 프리즘-신문보기>(1996)라는 전시를 개최했어요. 기성 사회는 남성적 시각으로만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시각에서 다시 바라 보자, 우리 사회가 담겨있는 신문을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고 전시를
                               해보자, 했던 전시인데 또한 상당히 반향을 일으켰었죠. 그 후에는 성에 대한 주제로 나아갔어요. 성 또한 남성적인 시각에서만
                               다뤄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에서 성은 어떻게 바라 봐야 되는지에 대한 테마로 여성 미술인만이 아닌 남성 미술인까지
                               참여해서 논의하는 장이 되기도 했죠.
                                   그 다음에는 <제주 깃발 미술제>(2002)를 했었어요. 제주도내 많은 작가들이 모였고 전시 공간을 야외로 확장하는 다양한
                               전시들을 해왔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에뜨왈은 좀 더 성장하고 확장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종후:    여성의 정체성 찾기,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젠더 문제 그리고 지역성에 머물지 않고 외부와 교류를 하면서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는 실험도 했고요. 굉장히 다양한 활동과 넓어진 관계망들이 동인이 갖고 있는 힘인 것 같습니다. 동인, 요즘은 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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