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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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보롬코지” 125
9월인데 동인미술관과 한국투자신탁전시실에서 전시하던 전국 순회 중인 작품들이었는데 경찰들이 그림을 압수해
갔고 행사를 주최했던 대표 문행섭 선배가 잡혀가게 됩니다. 남아있던 회원들은 거리에 나가서 이 사건을 알렸고,
‘잡혀간 사람 풀어달라’ ,‘경찰은 사과하라’, ‘그림 돌려달라'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었었죠.
당시 부양식 그리고 김희정 누나 이런 양반들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며칠 후에 문행섭 선배는 풀려났지만 그림은
압수당한 채 그림을 그린 광주 작가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그랬어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한편으로 뭐랄까….
기운 빠진 부분도 있었는데, 87년도에 시대적 분위기도 있었고요. 그때 여러가지 대형 사건들이 있습니다. KAL기 폭파 사
건(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있고 민정당(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도 나오고 그런 정치적 변동 과정, 그리고 6
월 항쟁으로 승리의 시절도 겪었죠. 이후 노태후 정권이 들어섰고, 박경훈 선배가 제대해서 돌아 오면서 ‘다시 한번
제대로 민중미술 활동을 해보자’해서 보롬코지란 이름으로 다시 모이게 되었죠.
이종후: 보롬코지의 전신이 보롬 동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같은 동인입니까? 전혀 다른 동인입니까?
김수범: 보롬코지라는 말은 보롬 동인에서 유래합니다. 아까 얘기했던 성명서에도 보롬동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후 정식
명칭을 보롬코지로 결정하면서 보롬코지 창립 이전의 활동은 보롬으로 호명하기로 정리했어요. 김수범, 문행섭,
박경훈, 부양식, 양은주 다섯 사람이 보롬코지 활동을 시작했죠.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 판화 교실이
있습니다. 진달래 판화 교실이 있었고 학내에는 민화연구회라는 동아리가 있었고요.
이종후: 보롬코지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술 내적인 조형적 실험, 이를테면 당시 민중미술 판화 운동과
맥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배경은 어떤 것일까요?
‘
김수범: 미술은 새로워야 된다.’ 당시 기성 미술에 반기를 들었던 거죠. 전국적인 추세였기도 했어요. 독일에서 시작된 신표현주의,
프랑스의 신구상 등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한국적인 것을 추구한 겁니다. 그게 새로운 거였죠. 그리고 대표적인
일제 잔재인 국전(일제강점기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본떠 1949년 제정 후 1981년까지 지속)에 입상하기 좋은 류, 쉽게
표현하면 예쁜 그림 말고 ‘제대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그림을 그려보자’라는 마음이 강했었고요. 표현 방식에 있어
서도 꼴라주라든가, 판화라든가 그런 걸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거죠. 그리고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 민중을 위한
미술 활동이어야 하니까, 그걸 실현하기 위한 기본 활동이 판화교실이였습니다.
판화 교실도 두 분의 영향을 받았어요. 하나는 서울의 두렁, 산그림패 활동을 했던 두렁에 대한 정보가 있었고,
두번째는 광주에서 시각매체연구소를 운영했던 홍성담 선생이 시민 판화교실 운영을 시작 했었죠. 그 과정을 제주에
와서 전해줘요. 제주에 바람 쐬러 왔을 때 술 한잔 하면서 ‘왜 판화를 이용한 시민 교실이 필요한가?’, 판화가 갖는
복제성, 전투성까지 포함해서 ‘정치적 무기로서의 미술이 필요하다.’ 하는 거죠. 서울에서 두렁이 진행했던 판화
교실 쪽 정보랑 광주 쪽 활동 정보를 같이 접한 거죠. 그래서 이런 활동을 우리 식으로 적용해보자 한 겁니다.
첫 계기는 신제주교회 하정환 선생의 도움으로 시작된 판화 교실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다들
초등학교에서 판화 배우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용인데, 현실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과정이 환기가 된거죠.
판화교실은 지속적으로 했고, 꽤 오래 해왔습니다. 제가 88년도에 교사 발령을 받고 강원도에 갔다가 방학에
제주 올 때마다 판화 교실 강사로 같이 활동 했었으니까요. 더불어 연하장, 연말연시 판화 연화장이 굉장히 인기가
좋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종후: 판화 교실의 참여 대상은 어땠습니까?
김수범: 주로 일반 시민들이었고, 교사분들도 계셨고, 대학생도 있었고 저희가 깜짝 놀랄 정도의 감동적인 작품들도 있었
습니다. 그것들을 더 찾으면 좋은데, 남아있는게 많지 않아요. 그 많던 판화는 다 어디 갔을까요. 하하하.
이종후: 판화라는 미디어가 서양에서는 문맹인들을 위한 성경 제작 때문에 발달했고, 동양에서도 부모은중경(부처가 말한
부모의 은혜)을 비롯한 일종의 계몽을 위해 사용되었죠. 서양이나 동양이나 계몽적 의미가 굉장히 큽니다. 민중
미술계에서 판화라는 미디어를 택하게 된 것은 계몽의 의미도 큰 것 같거든요. 어떤 것을 쉽게 알릴 수도 있는 장치
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보롬코지가 판화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셨나요. 이를테면, 4·3 이야기도 하셨나요?
김수범: 큰 주제 중에 하나였죠. 물론 그전에 문학에서 현기영 선생님의 『순이삼촌』이 있었고, 김수열 선배 시도 있었고,
강요배 선배가 서울에서 현실과 발언 활동을 했지만 보롬코지의 본격적인 활동은 강요배 선배의 <동백꽃 지다>
(4·3 역사화 연작, 1992) 이전이니까요. 그리고 그 <민족해방과 민족통일 큰 그림 잔치>(1987)의 걸개 그림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