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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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보롬코지” 129
그 일이 있고나서 내가 제대해 와 보니깐 보롬코지 창립 논의가 중단된 거죠. 활동도 아주 위축되어 있었고 대표도
잡혀가 조사받고 많은 후유증이 있었죠.
그러다가 내가 제대하고 온 다음에 (김)수범하고 (부)양식이가 찾아와서 같이 하자. 그래서 어찌어찌 내가 좀 졸지에
합류를 하게 된거죠.
그리고 김동수(지금 김유정)가 원래는 별로 그쪽 활동을 안 하다가 그때 본격적으로 같이 하자 해서 멤버구성이
된 거죠.
이종후: 창립전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 당시 미술계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박경훈: 보롬코지 창립전은 그 이듬해 1988년에 처음 개최를 했는데 창립전할 때 분위기가 재미있었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게 했지만 그림들이 좀 살벌하고 그렇잖아요. 이제까지 봐왔던 제주미술은 미술사쪽으로 보면 주로 고답적인
풍경화나 인물화 등. 이런 근대적 사조의 분위기가 쭉 이어 왔는데, 그러다가 1970년대 ‘관점’전 하면서 소위 말하는
구상 비구상의 경계를 깨는 시도를 했어요.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을 한 상태인데, 거기에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후에 ‘민중미술’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작품들을
처음 보니깐 좀 불온하게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빨갱이 그림 그린다.' 그런 상황이었죠.
이종후: 창립전 이후 활동이 궁금합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전시가 있었는지요.
박경훈: 1988년도에 창립전을 하고 나서 전시를 꽤 많이 했어요.
일 년에 6번 가까이 전시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주시 세종갤러리, 서귀포 상미전시실에서 하고 두 군데에서
전시를 하면서 나름대로 신고식을 치렀죠.
그 다음에 당시 전국적으로 나도 그때 시작한 판화가 꽤 있는데, 흔히 말해서 민중미술 목판화라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판화만 갖고 전시를 한 적이 있어요. 멤버 전부가 판화를 한 셈이죠.
지금이야 목판화가 하면 이철수, 이런 식으로 몇 사람 안 남았지만 당시는 민중미술이라면 판화랑 같이 병행할 정도로
많이 했으니깐. 그래서 우리도 그때 각자 판화들을 제작해서 ‘나의 칼 우리 노래’라고 세종 갤러리에서 판화만으로
전시를 했어요. 되게 강렬했었죠. 주로 4·3 얘기들을 많이 표현했어요.
1987년 6월 항쟁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면에서 일종의 시민혁명이었는데, 완벽하게 성공한 혁명은
아니지만 그것이 만들어 놓은 유아적인 국면이 생겨나죠. 그 틈을 통해서 다양한 특히, 문화 부분의 폭발적인 빅뱅이
일어났어요.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표현의 자유 부분은 확장되고, 특히 제주도 경우 어릴 때만 해도 4·3얘기를 하면 할머니가
제 손으로 입 틀어막아요. 4·3이란게 거의 한 몇 십 년, 그 당시 1980년대이니깐, 40년 가까이 입을 틀어 막힌 상황에서
문학에서 현기영 선생님이 1979년도에 이미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 놀이패 한라산이 80년대 초반부터 상징적으로
시작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4·3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죠.
그런 분위기가 다른 영역에도 싹트던 때, 문학, 그 다음에 미술 쪽으로 확장되었죠. 제주도에서 금기 중의 금기가
4·3이었는데 민주화는 금기를 깨는 거잖아요. 그 금기가 보롬코지라는 팀을 통해서 표현이 되기 시작하는 거죠.
4·3이라는게 말하는 것도 금기시되던 시대에 이제 작품으로까지 표현이 되면서 '‘이런 게 작품이냐 화가들이 너무
불온한 거 아니냐’ ‘화가들이 뭘 이런 걸 그리냐’라는 설왕설래도 많았어요.
그러니깐, 그림을 그리는 선후배 사이에도 ‘저런 그림을 그리냐’ 이런 식의 눈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시장에
안 가고 나중에 전시장 갈 때 그림 떼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또 하나는 현장 미술운동 개념인데. 제주지역의 오일시장에 가서 가두전시를 했어요. 그 당시 제주도 내 지역 현황 중에
컸던 이슈가 송악산 군산 기지 반대 운동이었어요.
송악산 군사 기지 문제에 대한 폭로나 이런 것들을 보롬코지 팀에서 판화를 제작해 광목천에 찍어서 대정 오일시장,
제주 오일시장에 가서 가두선전전 하고 더불어, 놀이패 한라산 같은 마당팀들하고 함께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동안 주로 전시장 안에서만 활동했던 화가들이 역사적인 사건과 제주도의 생존권 투쟁 현장에 지향성을
갖고 접근을 했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