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1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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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2020 제주미술제 ‘동인의 창립과 모색’
부양식: 학생들은 상당히 우호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보롬코지에 있는 회원들이 인간 관계를 상당히 잘했던 것 같아요. 학생들
간에 서로 인정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어떤 사람은 같이 참여하고 싶지만 미안하다, 이런 얘기할 정도였고요.
이종후: 지금은 4·3 70주년 추념식(2018)에 대통령도 오고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4·3이 금기어 중에 하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롬코지에서 목판 작업을 할 때 주제나 소재로써 4·3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부양식: 아니, 직접적으로 작업한 것도 있어요. 그 지평에는 좀 다양한 부분들이 있는데, 일단은 제가 84년 1월에 삼수를
했거든요. 83년도에 추계예술대학에 들어갔다가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려왔죠. 제주대학
교 시험을 보기 위해서 내려왔는데 그때 당시 김수범하고 여러 선배가 있었어요. <이 땅에 소리전>(1983)이라는 일회
성 모임이 있었는데, 시화전을 했어요. 제주의 개발 문제라든지, 4·3이라든지 이런 주제를 다룬 시들과 판화나 그림을
같이 전시를 했어요. 까메라타(?)라는 찻집이었나 잘 기억이 안나요. 거기서 제일 먼저 전시를 시작했고, 그런 것들이
나중에 보름 동인으로 가는 첫 번째 시작점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제주도 역사, 현실 이런 전체적인
부분들로 주제를 확장했거든요. 그래서 저마다 자신의 시각에 따라서 제주 사람들의 모습, 일하는 모습, 4·3에 관련된
것, 개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적 정서를 담는 것에도 관심
을 가졌었고.
이종후: 판화는 독학으로 배우셨습니까?
부양식: 독학이었죠. 그냥 우리끼리 공부했어요. 대학 수업이 아니고 다른 데서, 케테 콜비츠라든지 중국 목판화 운동이라든지.
그리고 얼핏 우키요에 이런 것들을 보는데, 우키오예 같은 경우에는 작업 자체가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식으로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아주 단순한 중국 목판화, 케테 콜비츠의 강렬한 작품들을 보고 배우면서 작업에 적용했고, 따로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선배들한테 많이 배웠죠. 홍성담 씨라든지, 김준권 선생님, 오윤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런 선배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칼맛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우리도 해 봐야겠다 생각하면서요.
이종후: 걸개그림이 경찰에 의해서 탈취가 되고, 검열도 심하고,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억압되던 시절이었는데, 동인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했을 때 그 외에 보롬코지 전시를 했을 때에도 정치적인 탄압이 있었습니까?
부양식: 보롬코지 회원만 참여한 전시에서는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던 적은 없었어요. 전시장에 프락치로 보이는 의문의 사람
들이 보이기는 했었죠. 이상호, 전정호씨는 당시에 작품이 탈취되고, 그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됐어요.
저는 아직도 그것이 엄청난 비수로 느껴지거든요.
이종후: 보롬코지는 제주 말고, 광주 혹은 서울이나 도외의 연합 형태가 있었습니까?
부양식: 우리가 <4·3 넋살림전>(1989)이라 해서, 그림마당민(서울)에서 전시를 했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는 민미협 작가들이
라든지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고, 현기영 선생님이 와서 지원해주고 했거든요. 그리고 정공철이형이 올라와서
오픈식 때 굿을 해 줬어요. 그때도 오프닝에 백 명 가까이 모였던 것 같아요. 그림마당민이 그렇게 큰 공간이 아니
었는데 거기서 굿도 하고 뒤풀이도 사오십 명 끌고 다니면서 몇 차까지 간 기억이 있거든요. 그때도 판화 교실 친구
들이 있었어요. 지금도 인연이 닿아서 가끔 톡을 하는데, 그때 그 친구들 다 어디 갔어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이종후: 89년도 지나고 탐미협이 90년대 초반에 결성이 되는데, 선생님께서도 보롬코지가 탐미협으로 진화하는 과정 안에
계셨습니까?
부양식: 논의 과정에서는 제가 없었어요, 사실은. 그런데 소식을 들으면서 탐미협 발기인 대회 때 내려와서 옛날 세종의원 앞
짜장면 집에서 모였었어요. 창립 회원이 되면서 활동을 했죠.
이종후: 일단 보롬코지는 굉장히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동인이었고, 당시 그림패로서는 충실히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미술 안에서 전혀 다른 식의 접근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 왔는데, 이후 보롬코지가 갖고 있는 정신이 탐미협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