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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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2020 제주미술제  ‘동인의 창립과 모색’



                        특히, 제주도 특별법에 반대했던 양용찬 열사가 서귀포에서 투신을 했는데, 투신한 다음날 초상화 두 개를 만들어
                    가두시위할 때 참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이 때가 가장 그런 활동들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이종후:  보롬코지가 특별히 주장하고자 했던 이슈가 있었나요. 이를테면 4·3문제라던가….



            박경훈:    창립 다음 해. 그러니까 1989년에 처음으로 4·3얘기를 좀 더 전면에 내세워요. ‘4월 미술제’라고.. 지금도 ‘4·3 미술제’
                    가 있는데. 그건 탐미협이 만들어진 다음에 나온 거고요. 그 전에 4월 미술제라고 해서 가톨릭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보롬코지하고 대학교의 후배들이 함께 전시를 했어요.
                        ‘칼그림패 거욱대’라는 판화하는 서클을 포함해서 다 끌어모아 ‘4월 미술제’라는 이름으로 가톨릭회관 지하 전시실에서
                    전시를 한 게 최초의 4·3에 대한 집단적 퍼포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에 동시에 ‘그림마당 민’이라고 인사동에 민중미술 운동 초창기에 핵심적인 장소죠.
                       그 그림마당민에서 ‘4·3 넋살림전’이라는 이름으로 4월미술제 때 했던 보롬코지 멤버들 작품하고 새로 만든 것들을
                    모아서 전시를 했죠.
                        그때는 학생운동도 NL운동이 강해서 NL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것 중에 하나가 그때 나온 ‘잠들지 않은 남도’라는
                    안치환의 노래와 한라산 이상화 시인...
                       하여튼 4·3이 반외세 자주운동의 상징성을 가장 많이 갖는 무장투쟁이라는 생각으로 했기 때문에 학생운동 전반에
                    걸쳐 4·3이 관심이 높았어요.
                       그래서 그림마당민에서 전시할 때는 사람들로 미어터졌죠. 4·3 특강도 하고 복합적인 전시를 했어요. 벽에는 그림을
                    걸어놓고 거기에서 굿도 하고, 지금 돌아가신 정공철 심방이 추모굿을 거기서 직접하고 그 다음에 4·3 특강 연사가
                    4·3의 역사 진실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하여튼 그러면서 인사동이 미어터질 정도로 성황리에 전시가 치뤄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후:   그러다가 보롬코지가 1990년대 초반에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박경훈:    당시 제주대학교가 미술교육과 였잖아요. 1989년도, 1990년도, 1991년도, 한 2~3년 폭발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멤버들이 다 교사발령 받아 강원도로 부산으로 가고 그러면서 동력이 확 떨어져요.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안남죠.
                       그러면서 예전처럼 폭발적으로 일 년에 여섯 번씩 전시하고 공방도 운영하고 했던 과거의 그런 동력 떨어져 버리죠.
                        먹고 사는 게 중요한데 다 어떻게 할거예요.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력이 빠지니까 몇 사람이 남아가지고 그나마
                    했던 전시가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전이라던가 메이데이 기념 궐기 판화전이예요.
                    이런 전시를 일 년에 한 두 번씩 했고, 그러다가 1992년도부터 침체상태에 들어가요.

            이종후:   결과적으로 보롬코지 활동기간이 1989년도부터 1993년도까지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짧은 기간이네요


            박경훈:   짧은 기간이에요. 짧은 기간인만큼 되게 뜨거웠던 시대고 요즘으로 치면 한 10년을 압축시켜 놓은 거 같아요.

            이종후:    보롬코지가 탐미협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미술계에서 탐미협은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보롬코지가 발족한지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애초에 보롬코지를 통해 질문하였던 문제는 답을 얻었는지요.

            박경훈:   그러니깐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까 무 자르듯이 이렇게 딱 해결되는 건 없어요.
                      우리 인간 자체가 마치 열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역에 내려서 다음 열차 올 때까지 기다리며 지내는 거 같다는 생각
                    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무 자르듯이 완전히 해결될 순 없지만 어쨌든 4·3이란 게 금기시되던 시대에 출발을 해서 이제 대통령도
                    그런 예술가들이 전시하는 곳까지 찾아 오게 만들었던 것.
                    그리고, 4·3에 관련해서 만큼은 나름대로 보롬코지는 역사적 역할을 했지 않느냐.
                      그리고, 그게 탐미협으로 이어지면서.. 실현되면서, 그걸 훨씬 증폭시켜내는 단계의 역할은 충분히 했던 조직이 아닌가
                    그 정도 자부심은 갖고 있습니다.

            이종후:   끝으로, 이번 제주미술제를 맞이하여 향후 제주미술이 지향해야 할 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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