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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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보롬코지”  133



                                     된 거예요. 우리 작업실, 그 사무실에 최소 2, 30명 많을 때는 100명 가까이 드나든 거예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얘기하다 보면 발전적인 얘기들이 오고 가고. 이 사람들이 전시하면 보러 가주고, 그렇게 지원을
                                     해준 거에요.

                             이종후:    판화 교실은 주로 어디에서 진행 했나요? 특정한 작업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 행사가 있을 때 어딘가를 빌려서 진행한
                                     건가요?


                             부양식:    네, 제일 많이 했던 데가 동인 저쪽이었고. 일시적으로 일주일이면 일주일, 5일이면 5일씩 빌려서 진행을 했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계속 교류하면서 행사에 참여하고 도와주고, 같이 했거든요. 보롬코지 전시 오픈
                                     하잖아요, 백 명 이상 모여요. 구호도 외치고, 뒤풀이하면서 지나간 일들도 얘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계획도
                                     세우고요. 판화 교실이 엄청나게 우리를 빛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종후:    결국은 판화를 매개로 했지만, 당시 문화 운동을 했던 모든 분야 음악 공연 등이 집단적으로 호응을 같이했던 기억이

                                     되겠네요. 요즘 전시는 미술인들의 축제로만 한정된 느낌인데, 그 당시가 오히려 더 전방위적인 예술 운동의 영역이었
                                     던 것 같습니다.

                             부양식:        87년도인가? 광주하고 연계한 사업이 있었는데 이상호, 전정호씨 등이 걸개그림들 하고 여러 작품을 동시 전시했었어요.
                                     (1987 <민족해방과 민족통일 큰 그림 잔치>, 동인미술관, 한국투자신탁 전시실) 어느 날 이상호, 전정호, 공동작품인
                                     걸개그림을 경찰이 탈취해 간 거예요. 그 당시 대표였던 문행섭 선배도 잡혀가고, 일이 일파만파 커졌죠. 그 이후로
                                     우리는 어떻게든 싸워야 했는데, 박경훈 선배는 군대 갔고, 김수범 씨는 방위하면서 들쭉날쭉 참여했거든요. 후배들
                                     하고 싸우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한 일은 경찰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두 번째는 제주대학교로 올라갔어요. 그때
                                     당시에 4학년이었는데, 학생회를 소집을 했어요. 미술과 학생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이런 사태를 보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학생들의 동의를 다 얻어서 대자보가 붙은 거예요. 나는
                                     아직도 그때 그 학생들한테 진짜 고마워요. 물론 그 다음 날 내려졌어요. 교수들이 훼방했고, 여러 가지 회유에 의해서
                                     대자보를 내린 거죠. 우리들은 집에도 못 가고 맨날 삐라를 만들어서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나눠줬어요. 당시에
                                     제주시 중앙로에서, 관덕정에서 계속 시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 시위 현장에서 계속 사람들한테 전단지 나눠주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이 싸워야 한다, 이런 활동들을 계속해 나간 거예요.

                             이종후:   1987년도 6월 항쟁과 맥을 같이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부양식:    네, 맞습니다. 그런 사건들을 거치면서 더 많은 판화미술팀들이 우리를 옆에서 지켜주죠. 89년까지 판화 교실이 이어
                                     졌어요. 이 판화 교실을 끝으로 제가 부산으로 발령이 나면서 보롬코지가 좀 달라지기 시작하거든요. 물론 그 전에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우리가 다 시각 매체이니까 사진팀도 같이 하자 그래서 보름코지 이름이 바뀌어요. 시각
                                     매체연구회로. 그때 이경자 씨하고, 김남영씨가 들어오고, 사진 분과 미술분과 이런 식의 분과별 구조가 되었죠.


                             이종후:   그렇다면 민예총 이전에?

                             부양식:    그렇죠. 민미협의 제주지회 같은 역할을 했어요. 민미협에 어떤 회의가 있다 하면 보롬코지에서 대표로 참여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지회를 만들 정도의 인원수가 충족되지 않았지만 ‘제주도를 대표해서 참여하겠다’ 해서 회의가
                                     있으면 참여하고 전국적인 상황들을 듣고 제주에서는 어떻게 활동을 하면 되는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이종후:   판화 교실을 할 때는 주로 목판을 하셨습니까?


                             부양식:    아뇨. 고무판을 많이 했어요. 당시에 목판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고무판 위주로 많이 했거든요.
                                     고무판이 천장 넘게 막 쌓여 있었어요. 우리 사무실이 없어가지고, 목욕탕이었는데 폐업한 곳이 있었어요. 한 오만원
                                     주고 빌렸어요. 남탕 여탕이 다 있으니까 서로 이리로 오지 마라 농담하면서 사용했는데 거기서 판화도 찍고,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하고 그랬죠. 판매도 저렴하게 했어요. 천원, 이천원, 약간 크고 정교한 작업이면 오천원 이렇게도 받고.

                             이종후:    그 당시에 보름코지가 매우 많은 호응을 얻고, 굉장히 센세이션 했죠. 보롬코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제주미술계의
                                     반응이나 학교에서의 반응들은 어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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