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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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2020 제주미술제  ‘동인의 창립과 모색’



                    집회 현장에 꼭 필요한 걸개 그림 작업도 많이 했었고요. 그 중에 4·3을 꼭 다뤄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거
                    든요. 문제는 조심스럽죠. 그때는 『순이삼촌』도 금기 도서였습니다. 길에서도 대학생들 불심검문해서 가방에서
                    그 책 나오면 바로잡혀가던 시절이니까. <4월 미술제>라는 이름으로 4·3행사를 했었고, <4·3 넋살림전>(1989)은 서울에
                    있는 그림마당민에서 했었죠. 그림마당민은 민중미술계 집합 장소이자 전시 공간으로서 큰 역할을 했었는데요. 당시
                    제주도를 비롯해서 전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와서 관람해주셨어요. 부대행사로 지금 돌아가신 전공철 선배가 굿을 했고,
                    그것과 관련된 양허관 선배가 4·3과 관련된 강연을 했어요. 4·3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알리는 그런 큰 역할을
                    했었죠.

            이종후:    당시만 해도 4·3이 금기어였는데, 당시 제주도에서는 그런 주제적 측면과 더불어 형식적으로도 파격적 혹은 이질적
                    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미술계 자체를 의식하지 않았던 동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제주도 내에 고등교육
                    기관이 제주대학교 하나였고 미술계 대부분 다 동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소식들을 쉽게 접할 수가
                    있었을텐데… 당시 제주미술계 반응이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김수범:    음… 허허허. ‘쟤네들하고 놀지마’, ‘저쪽 동네 가지마’ 이런 분위기가 컸을 겁니다. 지금도 민주화가 완전하게 됐다고
                    보기 어려운데, 물론 수눌음도 그랬습니다만 ‘저쪽은 빨간 경향이니 가지마라’고 할 때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 선생님들은 다 와서 전시 보셨어요. 제가 일기장을 뒤져보니까, 전시 첫 날은 저쪽 정보과 대공과(치안본부)
                    안기부에서 와서 쭉 봤어요. 창립전(1988) 작품들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강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다 제주에 관한
                    이슈였고 또 혁신에 관해서도 유머를 동반한 꼴라주 부분도 있고 했으니까요. 그때 원로였던 변시지 교수님이나 지금
                    돌문화공원 기획단장이신 백운철 선생님 등등 이런 분들이 전시를 다 보시고 속으로는 응원해 주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도 당연히 왔었고, 당시 사진을 보니까 학생들도 많이 왔었고 유치원 꼬마들도 와서 전시를 보더라고요. 그
                    동네가 번화가였어요. 전시 기간 동안 지킴이 할 때는 분위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전시 끝나고 나서 그 공간 안에서
                    생일 축하 파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 전시가 서귀포까지 가지 않습니까. 서귀포 고영우 선생님 화실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얘기도 나누고 상미
                    공간에서 전시까지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이어서 두번째 전시는 판화전 <나의 칼 우리 노래>(1988)였어요. 판화 교실을 위주로 활동 하면서 조직이 커지기도
                    했고, 다른 매체와의 결합도 이루어집니다. 사진패 시각인식이라는 팀이 있었는데, 그런 팀들과 결합하면서 시각매체
                    연구회로 확대 재편성이 되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88년 9월 1일자로 교사 발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전시까지만 참여 하고 세번째 전시부터는
                    출품만 하게 되요. 그리고 방학 때 내려와서 판화 교실 같이 진행하고 회원들과 열심히 만나고 어울리고 그랬죠.


            이종후:    보롬코지가 발전적 해체 후 탐라미술인협회(이하 탐미협)가 결성되었다 하는 선생님도 계시고, 선생님은 최근 탐미협
                    대표도 하셨죠. 보롬코지가 탐미협을 결성하는데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김수범:    결정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지만 큰 영향이 있었겠죠. ‘아, 이래도 되는구나’라는 부분. ‘미술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능하구나’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민중미술이 연구되고 인정받으면서 미술사적으로도
                    조명 받는 부분이 생겼죠. 그리고 제주미술계가 실은 다 동문이고 친구다 보니 당시 가족들을 생각한다거나 해서
                    선뜻 동참은 못했어도 내심 응원하는 마음들은 다 갖고 있었던 거죠.
                      당시 미술 언어로서 새로운 것이기도 했고, 미술이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부분에 다 공감을 하고 있었던거죠.
                    탐미협은 박경훈, 김유정 두 분이 애써서 모든 회원과 개별 면담을 통해서 결성이 됐는데, 이미 다들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던 거라고 봅니다.

            이종후:    보롬코지도 수눌음을 비롯해서 그림패, 사진패 또는 음악 공연 이런 것들이 같이 어우러져서 외연이 넓은 전시들을
                    같이 했다고 보는데 그 당시에 제주민예총(민족예술인총연합)이 존재했습니까?

            김수범:    아닙니다. 연결 관계가 어떻게 되냐면요, 광주의 황석영 선생님이 제주에 내려와 계시면서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하는데, 그때 제주도 문화패가 필요하다고 해서 80년대에 수눌음이 만들어집니다. 문무병 선생님 등 뜻있는
                    분들과 연극을 중심으로 한 수눌음이 만들어져요. 마당극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 전국에서 마당극 패들이 서서히
                    만들어질 쯤인데 거의 선도하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방에서 중앙을 치는, 수눌음 창립 선언문에도 나옵니다만
                    ‘변방에서 중앙을 치는 문화’를 만들자는 이슈 하에 제주도의 현실적인 문제, 역사적인 문제를 마당극으로 표현합니다.
                    문학, 연극 쪽 양반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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