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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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2020 제주미술제 ‘동인의 창립과 모색’
문화적인 관심도 있으시고 해서 전시공간을 몇 년 운영을 합니다. 미협에서 운영을 조금 도와드리는 방식으로..
미협에서 직접 운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획이라던지 이런 걸 도와드리고 그랬죠.
윤기혁: 동인미술관은 어느정도 운영이 됐습니까?
오석훈: 동인은 한명섭 선생님의 집이여서. 임대료라든지 그런 거는 없잖아요 일단, 자금에 많은 손실은 없었지만 결국은
거기도 나름대로 운영하다가 다른 사업이 좀 힘들고 그래서 결국 넘어가게 되죠. 그래서 문을 닫았죠.
윤기혁: 동인미술관이 생긴 게 한 80년? 남양하고 같이 생겼나요?
오석훈: 그러니깐 동인은 80년이 맞아요. 80년에 황석영선생님 저희 집에서 잠시 계셨어요. 그래서 저희 집에 있으면서
수눌음이 창단됩니다.
제주도에서 마당극을 처음 여는 효시 역할을 하는데, 그때 ‘땅 뿌리공연’ 그 다음에 ‘돼지풀이’ 라던지, 그 다음에
‘항파두리 노래’ 등등….
소극장 문화가 활성화되기 시작했죠. 거기에서 공연하고 또 미술군하고 이렇게 되면서 여기에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거죠.
이종후: 창립 이후 관점동인이 제주현대미술의 선두 역할을 해 왔는데, 그 이후 활동 상황들이 궁금합니다. 기억나는 활동이나
의미있는 전시회가 있었는지요.
오석훈: 사실 그렇게 해서 ‘관점’이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했죠. 그 당시 제주에 유능한 청년작가분들 중 ‘관점’ 소속
아닌 분들이 없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분들이 모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앙화단에 알려지게 되었고, 중앙의 신동아 라든지, 미술잡지라든지.
이런데 소개가 많이 됐었어요. 결국엔 초대전도 많이 가게 됐습니다.
서울, 부산, 울산, 심지어는 일본 오사카까지. 이렇게 초대전을 받음으로 해서 제주미술의 한 특징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죠.
그 당시에 일부 작가들은. 저도 같이 했습니다만은 한국 미술 청년작가회라든지. 이런데 같이 참여하면서 중앙 무
대에 진출을 많이 하죠. 그렇게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되면서 지역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어요.
지역 미술에 대한 논의들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중앙집권화 현상이 많았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지역의 어떤 특성이나
색깔 찾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라고 생각했죠.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을까? 이렇게 해서 우리도 지역 미술제를 하나 만들자. 그렇게 해서 중앙을 빼고
남부권을 중심으로 한 부산, 울산, 제주까지. 이렇게 벨트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1985년 제1회 남부현대미술제를 저희들이 주최하게 됩니다. 하여튼 지역 간의 교류를 상당히 활발히
하게 된 셈이죠. 그런 부분에서는 ‘제주미술을 알리는 중요한 모먼텀이 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종후: 지금 이 인터뷰도 제주미술제의 일환인데, 관점의 활동이 확장되면서 제주미술제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오석훈: 저희가 관점 회원들뿐만 아니라 남부 현대미술제를 추진한 경험과 능력들도 있고 해서 관점 자체가 서로의 개성을
중시하는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이 아니라 다양한 경향성이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젠 제주
미술을 통합해 보자.
그렇게 해서 1985년도죠. 제주자유미술제를 개최합니다. 사실, 제주자유미술제가 현재 제주미술제의 태동이 되는
셈이죠. 그러니깐, 프레(pre) 성격의 전시가 되는 거죠. 당시에는 재학생들도 참여를 시켰습니다. 그때는 민중미술의
태동기였고, 제주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중앙에는 있었지만 조금 뒤늦게 따라오는 경향이 있어서 그때 젊은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제주자유미술제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했어요.
제가 1992년에 미술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그 모토를 살려 ‘우리가 서울현대미술제 못지않는 제주미술제를 하나
가져 보자.’하는 의도에서 기획을 해서 열게 됐죠.
윤기혁: 제주자유미술제는 한 해로 끝났습니까? 자유미술제의 과정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