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제주미술제 2020
P. 44
제주동인 “관점” 047
그래서 그 당시에 조금 기억나는 것은 안일과 타협을 멀리하고 창조의 힘을 얻어서 지역 미술의 발전을 꾀한다.
그런 취지로 창립을 하게 되었죠.
이종후: 창립회원은 어떻게 구성 되었습니까? 특별할 기준이 있었나요?
오석훈: 그렇게 창립을 하는데 제주에 작가군이 풍성한 것도 아니고, 당시 젊은 20대 초반의 작가들이 했는데 숫자가
모자라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학에 다니는 재학생들 중에 고학년 3, 4학년 정도 포함을 시켜서, 그 정도는 이제
가능하니까. 한 일곱 명 정도 준비를 해서 창립을 했어요.
이후 팸플릿을 다 찍었는데, 첫 창립전은 나이가 제일 많으신 분이 강광 선생. 그 다음에 군대 갔다 와서 잠시
휴학 중인 강요배 선생. 그리고 연년생인 저하고 셋이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참여를 못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재학생들이 사회 단체에 참여했을 경우에 학교에서 제재를 하고 학위를 안주겠다.
이러한 아주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서 부득이하게 그 분들은 졸업을 하고 다시 합류를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죠. 그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이종후: 그 당시 얘기를 듣기로는 도록에 특별한 도장을 찍었다고 하던데요...
오석훈: 그래서, 재학생들인 경우는 창립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깐 나머지 셋이서 창립할 수밖에 없었죠. 재학생을 빼다
보니까. 그래서 반수 이상이 짤린 거죠. 스탬프로 ‘사정에 의해서 불참함’. 그렇게 스탬프를 찍었어요. 그 당시 도록을
새로 찍어낼 수도 없어서...그런 부분은 그 당시를 읽을 수 있는 아마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이종후: 그 당시 창립전을 대호다방에서 했던 걸로 알고있는데 그때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오석훈: 그 당시는 저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뭐 이런 것도 그림이냐?' 하는 반응도 있었어요, 형태가 좀
다른 것... 당시 다 추상회화만 있던 것이 아니고 구상 그림들이지만. 기존의 풍경화 일변의 그림과는 좀 다른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주목을 하고 그랬었죠.
그 당시만 해도 제주도에서 지금 같이 본격적인 갤러리는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고작 전시공간이란 것이 다방인데, 벽에 그림을 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준갤러리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다방인데.. 작품전시가 가능한 다방. 그 당시 대호다방. 저희들은 대호화랑이라고 그렇게 불렀죠. 전시가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서 창립을 하게 됐죠.
이종후: 다방 외에 다른 전시공간이 없었다는 말씀이신데요.
오석훈: 당시는 문화공간에 대한 갈증들이 많았어요.
제주도에도 1970년대 후반, 1980년대가 되면서 본격적인 전시 공간이 열립니다.
말 그대로 갤러리 이름이 ‘전시 공간’이라고..지금 중앙로 네거리에 생겼죠. 전시를 활성화하는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죠. 그러나, 당시 문화적 분위기가 그래서 오래 못 같죠, 어차피 운영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몇 해
못 가고 했는데, 그 다음에 이제 동인이라는 복합 공간이 생깁니다. 그 당시 거기서 수눌음 창단 공연도 하고,
제주도에 소극장 문화가 처음 태동하는 거죠.
그와 더불어서 동인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림 그리는 화가 분들에게는 사랑방이 된 거예요. 그 공간 자체가. 미술협회에도 그 사랑방 중심으로 해서 늘
모이기도 하고... 동인미술관 지하의 동인소극장은 그 당시로서는 제주 문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죠.
그 다음에 세종갤러리가 생기고...이렇게 됩니다마는, 어쨌거나 그 당시의 작가들한테 갈증을 풀어주는 상당히 고마운
역할을 했죠. 작고하신 한명섭 선생...저희 회원이기도 하고 해서.. 그 동인갤러리는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윤기혁: 선생님, 남양 전시공간은 몇 년도부터 몇 년까지 운영이 되었습니까?
오석훈: 년도는 정확치 않은데, 아무튼 1980.. 1985년도 인거 같아요.
윤기혁: 80년도에서 85년도까지..정도인가요?
오석훈: 하여튼 80년도 초반인데, 그때 당시에는 지금의 문화방송, 그 당시는 남양방송이죠. 남양방송 회장님께서 나름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