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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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뜨왈’, ‘6012’, ‘산남회’등이 이어졌고, 1990년대 역시 무수한 모임들이 생겨났다. 결국 예술가 인구의 증가가 소그룹의 증가로 이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작가 그룹의 역사에는 태어날 수밖에 없는 배경과 동력, 그리고 성장의 과정이 있다. 서울에 비해 보수적인 지방에서 미술 그룹들은
            대부분 매체, 학연, 지연 등에 따라 형성되곤 했다. 제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미술반, 미술학원, 미술대학 그리고 소수의 전시장
            외에는 미술 인프라가 거의 없는 열악한 지역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 또는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친한 선후배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곤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도 의미있는 전환점이 발생하곤 했다. 선배와 스승이 제시하는 길을 거부하고 한반도에 분 ‘현대미술’을 수용한 ‘관점’
            회원들, 좁은 조형적 이념보다 새로운 시각을 추구하겠다는 폭넓은 의식을 염두에 둔 ‘돌멩이회’, 신성여고 미술반 동문으로 시작해서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이슈를 포용한 ‘에뜨왈’도 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이 전국에 확산되던 가운데, 제주에 등장한 ‘보롬코지’는
            현실참여적 미술을 지향하며 민중미술과 연대했고, 이후 탐라미술인협회로 이어지며 4.3이라는 제주의 역사적 맥락을 부각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서귀포의 작가들이 만든 ‘산남회’는 제주 안의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도를 아프게 보여주며 예술가 지형의 불균형을
            알리고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1980년대 이후 1990년대 초까지 중앙의 미술계가 민중미술과 단색화 계열의 첨예한 대립 구도를 극복하고자 앞서 설명한 ‘소그룹’이나
            ‘신세대 그룹’ 일부가 설치, 개념미술, 퍼포먼스 등을 선보이며 다원주의적 태도를 실천했던 반면에, 제주는 그러한 변화는 만들지 못했다.
            1990년대에도 이미 중앙과의 문화적 거리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나 비엔날레의 전지구화 현상, 그리고 작가들의 개별화된
            활동과 같은 변화에도 크게 동참하지 못하게 된다. 여전히 회화가 압도적인 매체였으며, 조각 등 기존의 미술 장르가 소규모를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전반적으로는 친목이나 창작 공동체로서의 그룹에서 협회로 확대되기도 했으나, 반대로 그룹이나 단체를 탈피하려는
            작가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1990년대 제주의 미술은 협회 중심으로 전개된다. 1991년 제주한국화회, 1998년 제주조각가협회, 1999년 제주판화가협회가 등장했다.
            이러한 협회들은 주로 매체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집단화 현상을 이어갔다. 1996년 서울 및 ‘육지’에서 활동하는 제주출신 작가들의
            모임인 한라미술인협회가 등장했으나 조형 이념을 추구했다기보다는 공동 전시 주최 및 친목 도모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에 1991년
            <제주미술제>가 출범하여 제주도내의 작가들의 공동창작 발표의 장으로서는 가장 큰 행사가 되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민중미술 작가 강요배의 귀향은 새로운 협회로 이어졌다. 강요배, 박경훈, 김유정 등이 여러 작가들과 함께 1993년
            탐라미술인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그리고 전국의 민예총 네트워크와 교류하며 활동의 반경을 넓히곤 했다. 탐라미술인협회는 설립되자
            마자 1994년부터 <4·3미술제>를 개최하여 지금까지 매년 열고 있다. <4·3미술제>는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의제화하고 사회적 여건을
            형성하는데 기여하며 미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국내외에 구축된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바깥의 작가들을 참여하게 하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제주의 미술계에서 회화, 조각, 판화, 공예, 서예 이외의 다른 매체는 보기 힘들었다. 탐라미술인협회 창립전에
            오석훈은 미디어 아트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우루구라이 라운드 등 농민시위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제주에서는
            감귤밭을 태우는 시위도 있었는데, 이를 촬영한 영상 <실락원>을 발표한 것이다.
            1994년 시작된 <제주청년작가전>(제주문화예술진흥원)은 공공기관이 주도한 전시로 젊은 작가들의 산실 역할을 하며 서서히 매체의
            다양성의 장으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강주현, 부지현 등 여러 작가가 입체, 설치, 작품을 하며 도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제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대학원에 진학한 작가, 또는 제주에서 스스로 매체 실험을 통해 자신의 표현 언어를 찾아간 작가
            등 작가 개인의 각고의 노력에 의해 나온 변화였다.
            제주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들에게 지역성은 마치 DNA의 한 부분처럼 벗어날 수 없는 화두이다. 그러나 제주의 작가들만 지역성의
            한계에 머물러있던 것은 아니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이남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지역성에
            천착하면서 서울과의 거리는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공통으로 타개하고자 지방의 미술계를 연대하기 위한 교류전이 종종
            열리곤 했다. ‘관점’은 그중 대표적인 그룹으로 서울, 부산, 울산, 서울, 오사카 등 도외의 초대전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한 초대전이
            계기가 되어 연대의 폭을 확대한 대형 미술제가 1985년 등장한다. 남부현대미술제가 바로 그것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 주도적 역할에 제주
            의 작가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4. 남부현대미술제


            “당시 풍토가 우리나라에서 현대미술 하는 양반들이 한강 이남에서 작업하는 양반들을 인정을 안해줬어요.”

            백광익 작가가 이번 전시 <제주동인>에 참여하며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제주에서 만들어진 ‘관점’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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