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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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한국미술청년작가회는 제주와 인연이 많다. 이 협회는 1975년부터 부산, 광주, 춘천, 청주, 대전, 제주 등에서 회원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활동 영역을 지방으로 넓혔다. 제주에는 1979년 제12회 <한국미술청년작가회전>를 제주의 KAL호텔에서 열었으며 1981년에
            제주시 ‘전시공간’에서 제16회 <한국미술청년작가회전>을 열며 제주의 작가들도 같이 참여하게 했다. 매회 8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큰 행사였다. 당시 전국 화단의 규모에 비해 미술 인구가 수십 명에 불과한 제주에 상당히 배려를 한 셈이다.
            한국미술청년작가회가 제주와 인연이 깊은 이유는 이 단체의 초대 회장인 정관모가 자주 제주를 오가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제주를 종종 찾았으며 평화로우면서도 소박한 인심이 좋은 제주가 국제관광지로 부상하자 ‘한국미술을 세계에
                                                                    4)
            알리는데 서울보다 제주도가 낫겠다는 생각’에서 조각공원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제주의 한명섭, 박조유, 김택화 작가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조각공원 부지를 물색했고, 결국 1986년 신천지미술관을 세워서 꿈을 이룬다. 이 미술관은 한때 수십만 명의 유료
            관람객이 올 정도로 성공적이었으나 2005년 운영난에 문을 닫았다.
            정관모는 조각공원을 준비하면서 제주의 미술계와 가까이 지냈다. 그가 성신여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제주대 미대를 졸업한 학생들
            중에서 성신여대로 진학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는 1980년 제주시에 ‘전시공간’이라는 전시장이 생기자 이례적으로 서울의
            한 일간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깨끗하고도 품격있는 내부 시설은 서울의 어느 것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으며, 실내에 흐르는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멀리 보이는
            바다에 눈을 던지고 있느라면 제법 이국적인 낭만과 고독을 일깨워 주기도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제주의 대다수의 미술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고, 제주의 모든 작가들과 일반이 출입하면서 문화의 꽃을 가꾸어나가고 있음을 볼 때, 가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제주의 인심과 자연풍광, 그리고 미래 가치에 매료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체로 서울의 중앙미술계가 지방을 볼 때 시선은 주로 큰 도시에 집중되었다. 그중에서도 ‘4대 미술권’만 주목을 받곤 했다.
            광주, 부산, 대구, 목포는 당시 도시마다 적게는 1백 명, 많게는 3백여 명의 작가들을 확보하고 미술의 정체성에 지역성을 녹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1970년대 서울에서는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추상미술을 추종한 세력과 아카데믹한 미술에 천착한 세력의 대립이 첨예하게 작동
            하고 있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추상미술을 시도한 청년작가들의 세력화를 모색했던 박서보가 미협의 부이사장, 이사장을 지난
            1970년대 내내 ‘현대미술’의 주도권을 잡고 해외로 보낼 한국 대표작가 선정부터 지방의 현대미술 확산까지 국내외 활동에 공을
            들였다. 그런 가운데 대구는 지방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를 출범시키며 서울에서 분 추상미술의 열풍을 토착화
            하고자 했다. 그런 대구의 행사에 박서보가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미술제’는 이후 서울현대미술제(1975), 부산현대미술제(1976) 등으로 이어졌으며 1978년에는 전주의 전북현대
            미술제 설립으로 이어진다. 덩달아 광주, 춘천, 청주 등 전국적으로 거세게 ‘현대미술’의 바람이 분다. 당시 한 언론은 이런 현상을
                                                                                        6)
            지적하며 ‘우리미술사상 이처럼 전국을 무대로 전개된 「미술운동」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제주의 ‘관점’ 그룹이 1977년 탄생한 것은 제주 미술계의 보수적인 성향을 극복하려는 내적인 요인도 있었으나 동시에 ‘현대미술’의
            바람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배경도 뒤에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점’의 현대미술은 초반에 추상미술에 반대하던 제주대
            교수들이 ‘은연중에 억압과 강요’하며 힘든 시기를 겪는다. 이런 상황이 슬펐다는 관점 회원 백광익은 자신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1978년
            유서 깊은 창작미협의 제3회 공모전에서 입선을 받았다. 창작미협은 1957년 장리석, 이봉상, 류경채, 최영림 등이 회원으로 참여한
            협회로 특별한 양식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별로 현대정신을 구현한다는 목표 하에 탄생한 단체로 사실상 한국현대미술의 성장과
            맥락을 같이해온 단체이다. 1976년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공모전을 열기 시작했고, 그 3회 공모전에 백광익이 출품
            하여 수상을 하며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제주에서 ‘현대미술’의 터를 잡기 위한 노력이 ‘동인’의 활동에 머물러있던 시기에 타 지역에 들어선 현대미술제들은 서울에서 시작된
            ‘현대미술’을 토착화, 보편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미협 작가들과 지역 미협의 작가들이 혼합된 운영위원회를 유지하고 전국에서
            작가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운영구조나 전시하는 작품들이 유사한 경우가 많아 ‘지방미술제’로서의 차별화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일었다. 주된 이유는 추상미술의 옹호자였던 박서보, 윤형근과 같은 서울 미협의 임원과 작가들이 지방현대미술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지역의 서예나 동양화, 또는 사실적인 구상미술계에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오광수와 같은 평론가들이 찾아와
            특강을 통해 현대미술을 소개하는데 대부분 서양화 중심의 현대미술이었다. 그러나 ‘현대성’을 강조하며 전국적으로 세대 변화를
            이끌었고 ‘모더니즘 계열’이라는 미술이 지역에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제주의 미술계는 1970년대 후반기 분 ‘현대미술’의 전국적 확산 속에서 ‘관점’을 태동시켰고, 이런 활동에 주목한 것은 ‘관점’의

            4) 신연수, 「‘신천지’관장 정관모씨 “미술발전에 보탬됐으면...」, 동아일보 1993년 6월 12일.
            5) 관모, 「전시공간」, 경향신문 1981년 2월 28일.
            6) 「지방으로 번진 현대미술제, 출품작 운영 천편일률」, 동아일보 1978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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