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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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포르멜이 한국현대미술의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하던 시기의 미술계를 진단하는데, 당시에 미술계를 나누고 있던 동양화/서양화,
국전계/야전계, 구상파/추상파의 구도를 지적하면서 “각종 유파들의 미술동인체의 운동”으로서 신상회, 창미회, 악뛰엘, 목우회, 백양회,
묵림회 등을 거론한다. 이 명칭들을 보면 ‘동인’은 소그룹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남고 ‘00회’라는 명칭이 더 선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여러 미술 단체에 보낸 한 공문을 보면 ‘동인’이라는 단어가 점차 어떤 맥락을 확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해 3월 15일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위미술 작품전시에 관한 협조의뢰’라는 공문을 보낸다. 이 공문의 수신자는 “미술단체 및 동인
그룹”으로 ‘올바른 창작 기풍의 조성’을 위해 향후 전시할 수 없는 미술에 대한 안내였다. 안내문에는 ‘전위를 위장한 사이비미술’과
‘옥내 전시를 목적하지 않은 미술행위’를 예로 들면서 ‘관(棺)이나 시체모형에 피를 흘리는 광경’, ‘종이나 헝겊 등 인화질물을 늘어
뜨리고 주위에 촛불을 켜서 화재위험을 자아내(는)’ 작업, 또는 ‘옥외 해프닝같은 공서양속(公序良俗)에 저촉’되는 작업들을 들고 있다.
퍼포먼스, 해프닝과 같은 실험적인 미술이 확산되자 유신 시대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국민적 차원의 건전성과 대중성’을 지키
겠다는 명목하에 나온 조치였다.
2. 서울과 제주의 연결고리들
서울이 한국의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위상이 높아져 갔으나 그렇다고 일제 강점기 지역의 화단을 구축한 도시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문화적 위상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지방이 서울에 비해 문화적 구심력을 크게 잃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서울로 인구
유입이 급속도로 빨라지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각종 미술제도와 기관이 서울에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서울대와 홍익대를 중심으로
미술계의 주도권이 형성되었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는 이미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으며, 해외의 미술이 수입되고 전시되는 곳도
주로 서울이었다. 미술평론가들도 서울에서 진행된 전시에 초점을 두고 리뷰를 작성하곤 했다. 한국미협이 해외의 비엔날레에 참여할
작가를 선정할 때에도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작가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미술의 중앙집중화가 일어난다.
1970년대 중반 미협의 한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화가가 1천 명 정도였고, 지방 전체를 통틀어 그에 육박하는 1천 명 정도가 화가로
2)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지방의 구도가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에는 지방과 서울의 문화적 거리를 축소
하려는 시도가 등장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전이다. 1971년부터 서울의 전시가 끝나면 지방의 1개 도시에서 순회전을 열곤
했는데, 대구, 대전 등에서 관객을 맞기도 했으나 1978년 전시작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중단되었다. 제주에서 국전의
순회전은 열리지 못했다.
서울에서 지방작가를 초대하여 전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의 국가기관이 지역의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려고 정책적으로 배려한
것이다. 1974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로 연 ‘지방작가초대전’은 지방작가 2백 37명을 초대하였다. 동양화, 서양화, 판화, 서예, 조각 등
분야별로, 지방별로 각 1명씩 선정하여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당시 광주의 허백련, 김제의 나상목, 부산의 임호, 광주의 오지호 등이
전시했으나, 아쉽게도 10호 크기의 그림 위주로 전시되어 서울 미술계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의 작가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1970년대 제주 미술계의 대표적 작가를 고려한다면 아마도 서예의 소암 현중화였지 않았나 추측된다.
‘지방작가초대전’은 1975년에도 개최되었으나 이후 중단된다. 문예진흥원은 ‘중앙, 지방작가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을 이유로
이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하는데, 사실은 그 외에 다른 문제들, 즉 한국미술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나타나서 차라리 개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전시를 가질 기회가 적었던 시대에 각 지역별로 1명씩 선정하는 과정에서
3)
치열한 밑 작업이 벌어지는데, 과도한 출품 경쟁과 작가 선정을 두고 부작용과 부조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977년에는 한국문화원
연합회가 ‘향토작가초대전’을 열어서 사라진 ‘지방작가초대전’의 명맥을 잇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속되지 못했다.
1974년 서울에서 출범한 한국미술청년작가회는 기성화단에 반발하는 20, 30대 작가들이 모인 단체로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의 청년
작가 단체였다. 회비를 모아 야심차게 1977년 서울 인사동에 한국청년작가회관을 마련하였으며 이곳에서 회원전 <한국미술청년
작가전> 뿐만 아니라 제주를 비롯한 지방의 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를 열기도 했다. 청년이라는 공통 분모를 토대로 “미술문화수준
격차를 줄이고...폭넓은 유대의식”를 지향했다.
이 단체는 주로 추상미술을 포함한 새로운 현대미술의 지평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하여 청년작가들을 엮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했다. 그래서 지방작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자는 의도에서 1978년 처음으로 광주의 ‘에포크’ 동인들을 소개한 <현대작가 에포크>
전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제주의 작가들을 초대하여 청년작가회관에서 전시를 연다. 이 전시가 바로 제주의 ‘관점’ 동인들
8명(강광, 강요배, 고영석, 고영우, 박조유, 백광익, 오석훈, 한명섭)을 소개한 역사적인 전시였다. 한국미술청년작가회는 1981년에도
청년작가회관에 ‘관점’의 작가들을 초대하여 전시를 개최했다.
2) 「지방화가는 소외당하고 있다」, 조선일보 1975년 7월 16일.
3) 「지방작가 초대전 2년 만에 없애」, 경향신문 1976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