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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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의 맥락에서 본 제주의 ‘동인’과 제주 작가들














                                  2020 제주미술제 자문위원 / 숙명여대 객원교수  양 은 희



               1. 동인, 작가 모임의 시작


               한국미술계에 서울/지방이라는 구도가 등장하기 오래전, 서구의 미술 개념이 수입되던 시기에는 작가가 어느 지역 출신이던지 생애
               끝까지 예술가로 활동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미술과 예술가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못한 시대에 ‘신기한 기술’을 터득하고 창작에 전념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거나 자긍심을 갖기에 척박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국인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두 번째 작가 김관호는 일본에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던 1916년 일본의 문부성 미술전람회
               (문전)에 <해질녁>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귀국한 후 <해질녁>에 나온 여성 누드와 같은 그림을 그리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며 작가로서의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누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받던 멸시, 그리고 예술가로서
               활동하기에 열악한 사회적 환경 때문에 1927년경 화단을 떠났다. 그는 한참 후에야 다시 미술을 하기 시작했는데, 북한에서 조선
               미술가동맹이 가동되던 1954년의 일이다.
               한 개인의 주체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감성을 자극했고, 서울뿐만 아니라 근대화된 도시 여러
               곳에서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 ‘모던 라이프’를 공유하며 그룹을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학교에 미술부가 만들어진 도시에는 작가군이 빨리 형성되곤 했다. 학교와 더불어  사설 미술연구소도 미술교육의 산실
               역할을 하곤 했으며, 그렇게 일제 강점기 동안 경성(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군산, 평양, 부산 등에 작은 지역 미술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상이라도 하게 되면 개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영광이었다.
               예술가들이 모인 소규모 그룹을 ‘동인(同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부터 새로운 문예 그룹
               들을 ‘동인’이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제도권 밖에서 모임을 유지하며 ‘동인지’, 즉 구성원들의 작품을 모은 잡지를 소규모로
               출판하여 발표의 장을 스스로 마련하기도 했다. 미술에서도 특정 그룹이나 그룹의 회원들을 ‘동인’이라 부르곤 했다. 그렇다고 딱히
               소규모 그룹에 한정된 용어도 아니었던 것 같다. 특정 단체의 취지에 공감해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동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이나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용어였던 것 같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문학, 미술 분야에서도 공통의 취미나 취향을 가진 작가들이 모인 사적인 소규모 그룹을 동인(同人)이라
               부르게 된다. 한국의 신문학은 동인들이 만든 잡지, 즉 ‘동인지’에 기대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 분야에서 나온
               <소년>(1908)은 이광수 등이 참여한 동인지였으며 ‘폐허 동인’은 엽상섭, 오상순 등 문학인들이 모여서 1920년 만든 그룹으로 잡지
               <폐허>를 발간하며 자신들의 시대를 글로 남기고자 했었다. 미술에서는 1923년 이상범, 노수현 등이 모여 한국화 동인 ‘동연사’를 출범
               시켰고, 1929년 도쿄미술학교 동문들이 모인, ‘동미회’, 1934년에는 서양화 동인 ‘목일회’가, 1940년에는 ‘파스동인(PAS同人)’이
               구성된다. 이외에도 ‘00회’라는 명칭의 그룹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들은 매체나 학연에 따라 모였다가 해체되곤 했다.
               일제 강점기에 동인에 가입하거나 동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앞으로 미래에 자신이 정한 예술 분야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 창작을 하는 것보다 단체활동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1939년 한 신문의 사설에는 서울에서 열린 ‘재동경
               미술협회’ 2회전을 알리며 일본의 여러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졸업생 1백2십여 명이 참여하는 이 협회에 참여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술의 동인(同人)들은 앞으로 그 전문하는 바에 좀 더 정진하야 앞날의 대성을 기하는데”라고 강조하고 향후 “이 땅에서도
               ‘미켈란젤로’가 나오고 ‘피카소’도 나오게 하여야 하겠다”고 격려한다.       1)
               일제 강점기에 보편화되기 시작한 ‘동인’ 개념은 해방 후에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소그룹이나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을 ‘동인’이라 불렀으나 그룹의 명칭에는 ‘동인’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에서 ‘귤동인’이 창립된 1960년대
               초는 국내에 미술 인구가 늘어나면서 소규모 그룹의 수가 많아진 시기였다. 1963년 3월 26일 조선일보에 실린 「한국미술의 분포도」는


               1)  「사설: 미술협회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9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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