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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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초대전을 이끈 한국미술청년작가회이다. 사실 한국미술청년작가회를 제외하고는 제주의 미술계에 주목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서울의 한 신문은 지방의 미술계가 소외당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면서 ‘경기, 강원, 제주 일원은 중앙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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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도, 지역 내의 공통이념도 없이 뒤떨어진 상태이다’라고 쓸 정도이다.
1980년대에 들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이 늘고,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는 학생이 늘면서 지역의 인재는 더 많이 유출된다. 지역성을
넘어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청년들은 화랑, 미술관 등 미술계가 형성된 서울에 남아 작가의 길을 가곤 했다. 물론 지방의
사립, 국립대학의 미술대학은 지역의 인재들을 배출하는 거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유학을 마친 학생이 고향으로
돌아가 교편생활을 하면서 창작을 하거나,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등 다시 지역의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 지역의 특수한 환경을 배경으로 ‘지역성’을 화두로 삼고 창작에 매진하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 현대미술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 서울과 지역의 문화적 거리는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서울의 문예진흥원은 지방의 작가들을 위한 기회를 또 다시 마련했다. 1980년 12월 문예진흥원은 제1회
<지방미술단체연합전>을 개최하는데 광주, 부산, 대구, 대전, 마산, 경주, 진주 등 7개 지역의 11단체에서 선발한 91명의 작가를 초대
한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받은 참가 신청에 전국 56개 미술 단체가 응모했을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장소 부족으로
11단체만 선정하게 되었고, 남도조각회, 무등전, 전우회 등 각 지역의 미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단체들이 선정된다. 어쨌든
‘역량있는 지방작가에게 서울 전시회를 제공, 소외된 지방화단의 작품을 공개함으로써 정당한 평가와 이해’를 받도록 하고자 했던
국가기관의 정책이 다시 한번 발휘되었던 사례였다.
이 전시는 1982년에 2회가 개최 되었으며 경북조각회, 광주현대작가 2000년회, 르뽀동인회, 전북현대작가회, 미협군산지부, 미협
마산지부 등 15개 단체 78명 참여했으나 어느 전시에도 제주는 보이지 않는다. 주최 측은 ‘미술문화의 중앙집권적인 현상을 벗고
중앙과 지방간의 균형있는 발전과 교류’를 지향하기는 했으나, 제주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전시도 1970년대의 ‘지방작가초대전’과
마찬가지로 지역작가 참여에 있어서 기회의 불균등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면서 3회는 열리지 못했다.
‘동인’이라는 용어가 서서히 사라진 것은 1980년대이다.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소그룹’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곤 했으며, 그룹의 수명도
1-2년, 또는 길어야 4년 정도에 머무르며 그룹의 생명력을 창작 이념의 지속성에 두기 시작했다. 따라서 과거처럼 ‘00회’라는 명칭
하에 친목을 유지하는 모임보다 ‘뮤지엄’, ‘로고스와 파토스’, ‘메타복스’, ‘난지도’, ‘현실과 발언’ 등 그룹의 개성을 표방한 명칭이 등장
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미술사에서 이들의 활동은 1980년대 한국미술을 소개할 때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계열의 갈등 속에서
다원주의를 보여준 현상으로 빼놓지 않고 언급된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세대 그룹’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과거와 다른 청년 세대의 그룹이라는 의미이다. 이 신세대 그룹으로는
‘WHO IS WHO’, ‘ACT’, ‘SUB CLUB’ 등 영어를 사용한 그룹 명칭이 늘어났고, 그룹의 목표도 특정한 방향 설정보다는 작가들의 표현의
다양성이라는 폭넓은 지평을 선호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가 되면 광주비엔날레가 설립되고,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들어서 한국 작가의 국내외 교류가 빠르게 전개된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비엔날레 붐 속에서 해외에서 한국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
지면서, 한국미술계는 서서히 ‘글로벌 컨템포러리’ 미술의 첨예한 현장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국제행사에 참여할 작가 선정의 권한은 기획자와 평론가들로 옮겨진다. 1971년미술평론가 이일이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작가 선정을 맡은 이후 이러한 전환은 1990년대에 들어 완전히 고착된다. 그러면서 사실상 작가들의 모임이나 협회에
가입할 때 누리던 혜택이 감소하자, 자유롭게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창작자, 큐레이터, 평론가 등이
모두 개인단위로 활동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임시 목적으로 잠시 모였다가 해체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3. 제주 미술 동인들과 시대 변화
서울에서 본 제주는 1970년대까지도 특별한 경향을 보이지 않는 작은 화단이었는지 모르나, 제주 내에서는 천천히 작가군도 늘어나고
활동도 늘고 있었다. 1960년대 고등학교 미술 수업이나 사설 미술연구소에서나 배울 수 있던 미술이 대학 교육의 일부가 된 것은 1973년
제주대학에 미술교육과가 창설되면서이다. 이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가지 않아도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저변 인구가 확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5년 설립되어 이미 가동되고 있던 제주미협은 그렇게 배출된 작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975년에는
제주도미술대전이 설립되어 서세옥, 남관 등이 심사위원으로 방문하여 수상자를 가리며 청년 작가들의 창작 열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당시 제주에서 작가들의 소규모 그룹은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위한 터전 이전에 작가로서의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격려와 우정의 공동체
라는 역할이 강했다. 이번 <제주동인> 전시를 계기로 예술감독 이종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화맥회’(1970년대), ‘화실동인’(1971),
‘녹우회’(1975), ‘관점’(1977), ‘돌멩이회’(1978) 등이 이어지며 작가들 사이의 연대와 활동이 늘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협’, ‘소담’, ‘보롬코지’,
7) 「지방화가는 소외당하고 있다」, 조선일보 1975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