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6 - 제주미술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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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동인 “산남회”  159



                                  그 다음 서귀포에 전시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해요. 서귀포 사람들이 제주시로 가서 전시를 해요. 서귀포 내에서 전시가
                               아예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서귀포 사람 입장에서 빚진 것을 갚자 해서 서귀포에서 전시를 하자. 그리고 젊은이답게 1년에
                               1번 전시가 아니라 합쳐서 2번은 하자. 방법도 1차 서귀포에서 하고, 2차로 제주시에서도 하고. 그리고 소품 위주가 아니라
                               최소 50호 이상, 100호 이상으로 해서 작가 정신을 좀 기르자 했어요. 소품을 하게 되면 아까처럼 아마추어리즘 작가분들이
                               ‘나도 집에 작은 그림이 있는데 왜 참여 안 되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전시 참여를 묻는 일은 제가 십자가 매겠다 했죠.
                                   그러고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면담했어요. 바로 윗 선배들한테 갔더니 ‘외부인이 와서 서귀포 분위기를 깨느냐’ 이러는 거예요.
                               나는 지금 현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20년 후를 내다봤을 때 지금처럼 가다가는 미술계가 없어져 버린다고 했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찬성하는 사람들은 ‘나는 앞으로 작가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하던 젊은 사람들이었어요. 아까 얘기한 박성배, 양승우
                               작가 등이 찬성을 하고, 반대하는 분들은 ‘왜 이렇게 이단아들이 생겨서 지역을 깨느냐’ 이런 식이었고요.


                                   어쨌든 그 와중에 만들어지는데 처음 7명이 만나서 명칭을 어떻게 갈 것이고, 앞으로 방향을 어떻게 갈 것인가, 얘기했죠.
                               일단 우리가 모여 버리면 제2의, 제3의 서귀포 지역의 동인은 생길 수가 없다. 그러면 대표성을 가질 수도 있는 거고, 서귀포에
                               거주 하거나 서귀포 지역에 생활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오픈하자. 말 그대로 서귀포 미협처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로서 가져야 될 태도는 반드시 가져야 되기 때문에, 우리 회원들이 만장일치가 되어야 들어 올 수 있도록 했어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싫어하면 그분이 왔을 때 분위기가 해체되니까요. 그래서 시작을 하면서 과제가 된 게, 큰 작품 1년에 2번
                               서귀포 전시를 기본으로 하고, 제주시에서도 전시하고요.

                                  명칭도 만들 적에 박성배 작가가 말을 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산 남쪽이니까 산남회라는 명칭을 쓰자, 그래서 산남회라는
                               명칭이 과연 동인의 이름으로 적합한가 말이 많았어요. 우리 생각을 아우르는 만족할만한 단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산남으로 가고 더 좋은 명칭이 생기면 바꾸자 했는데 한 두번 전시하다 보니깐 산남이라는 말이 더 피부로 와 닫고, 이것처럼
                               좋은 단어가 없었어요. 서귀포 출신이나 서귀포 거주했던 사람한테는 산남이라는 말을 하면 내 고향 같기도 해서 처음에 했던
                               언제쯤 바꾸자는 말이 자연스럽게 없어져 버렸어요.


                                   그때 정말 안쓰러웠던 거는 예술의 고향인데 다른 분야들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사장돼 버리는 거죠. 미술과 같이
                               할 수 있는 영화나 음악 분야의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분들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때 한 세 분 정도는 강압적으로 ‘대학 들어가라’, 아니면 ‘제주도미술대전에 출품해서 작가의 길을 가자’고 했는데, 나이
                               들고 보니까 만약에 제가 그렇게 배척 됐을 때 과연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좀 반성되는 부분도 있어요.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추진을 했는데, 산남전 운영에서 굉장히 힘을 주는 분들은 정작 서귀포 분들이 아니라 제주시에 있는
                               우리보다 몇 년 위에 있는 선배 미술인들이 엄청 격려를 해줬어요. 그래서 서귀포에서 전시를 시작해서 2년 밖에 안 됐는데,
                               그때 박성배, 양승우 등 활동력이 뛰어난 작가들은 제주시 미협에서도 와서 일을 하라고 하고요. 우리는 한 10년을 목표로
                               잡았는데, 3년에서 5년 정도 되니까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지칠 정도였어요. 선배들이 갖고 있는 사명감이라고 해야할까,
                               후배들 중에서 같이 활동해야 되겠다 하는 친구가 있으면 매일 만나서 ‘너 산남회 해야 된다, 산남회 와야 될 운명이야’ 하면서
                               만들어졌어요. 애정이 많았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서귀포 미협이 생기면 산남회가 일차적인 역할은 다한 게 아닐까 싶어요. 서귀포 미협이 생길 때 저는
                               자연스럽게 빠지겠다 했어요. 왜냐하면 서귀포 내에 단결이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제가 끼게 되면 서귀포 미협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고 어르신들이 탐탁치 않아 할거다, 산남회는 산남회 대로 방향성을 다시 만들겠다 했죠. 그래서 15년 정도 했나?
                               이후 서귀포 미협이 결성되고, 산남회 활동하던 사람이 서귀포 미협으로 가고 하다 보니까, 산남전은 약간 시들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수 예술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걸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갈등이 많았었는데 순수예술
                               한국화, 서양회, 조소로 가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좀 힘들겠지만 회원가입은
                               만장일치제로 해서 신입이 들어오면 열심히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자 했죠. 첫 전시 당시 1993년도이지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제주시 1970년대 다방 전시였어요. 한 10년 차이 터울이다 보니까 전시도 그런 곳이었어요. 커피숍 닮은 곳에서
                               전시를 했어요. 처음 전시할 때 제가 기억나는 게 ‘두고 보자’ 했던 사람이 있었고, 아마추어리즘 쪽에. ‘과연 너희가 서귀포를 대표할
                               수 있냐’고 걱정하는 선배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한 사람이 큰 작품 2점 이상씩 일곱 명이 전시를 한 번 딱 하니까 그런 말이 싹
                               없어져 버리더라고요. 보통 소품을 하는데, 큰 작품을 하니까. 당시에 그림들이 진짜 알찼어요. 선배들의 시선이 달라졌죠. 또
                               제주시에서도 보러 오니까요. 그걸 제주시에 들고 가서 전시를 했더니 젊은 사람들한테 쇼크였어요. 그런 작품들, 동인이 별로
                               없었고 그 당시에 돌멩이회 정도 실험적인 것을 할 때니까. 그땐 관점 같은 경우는 뒤로 물러섰던 때인데 ‘쟤들은 앞으로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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